벤치에 앉아서 기다리는 만큼 무의미한 시간은 없을 것이다. 언제 누구 어디로 올지 알수 없는 불편한 불안감에 휩싸여서 앉아있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행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은매너 있고 괜찮은 사람이라면 한시간정도는 참아주는 센스를 가져야 한다. 문제는 내가 낙서되고 오래되어 나무판자가 덜렁 거리는 이 낡은 벤치에서 무려 3시간동안이나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 차라리 판토마임을 하는 것이 몇배는 쉬울것 같은 기분이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기네스북에 올라갈수 있을지에 대한 원대한 기대를 살포시 가져보기도 했지만, 결국은 지루하고 슬슬 화가난다는 것이다.
´30분만 더 기다린다. 안오면.. ´
주먹을 힘껏 지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한 나는 몸을 움크리고 앉아 빨간색의 야구 점퍼의 주머니에 거칠게 손을 집어넣었다. 마침 황혼을 휘감은 비행을 마치고온 비둘기 때가 벤치 앞에 모여들었다. 벤치에 사람만 있다면 쉽게 그날 저녁거리를 구할수 있을 거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그것을 십분 활용하는 매우 간악한 것들이다. 누가 기억하리오. 저들이 한때 찬란한 평화의 상징이었다는 것을. 이제 저들은 더럽고 간단히 빌어먹으려 하는 한가한 노인들의 대화상대일 뿐이었다. 그때 그 녀석이 나타났다. 비둘기에 대한 부정적인 비평을 하고 있던터라 당연히 그 감정이 나에게 썩여 나올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다.
˝야 너 뭐야, 니가 불렀잖아.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마치 삶의 108가지의 고뇌를 한꺼번에 받은 듯한 석가모니의 수행시절과 같은 표정을한 그 녀석은 특유의 작은 몸을 한껏 수그리고 얼굴을 붉혔다. 그런 모습에도 나는 조금도 화가 가라안지 않아 더욱 고개를 하늘 높이 들고 눈빛으로 바위를 쪼갤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매서운 눈으로 그 녀석을 바라봤다. 순간 햇빛이 그 녀석의 눈가에서만 반짝인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갑자기 내가 순진한 초등학생을 괴롭히는 아주 못된 중학생처럼 느껴져서 그 녀석에게 한다는 말이
˝그렇게 하고 있으면 뭐가 달라질줄 알아? 웃기지마, 그렇게 얼굴을 붉혀야 할 사람은 바로 나라고 니가 아니라˝ 라고 소리쳤다.
아아. 또 시작이군. 도저히 나를 주체할수가 없다. 어쩔수 없다. 아니 안되는건 안되는 거다. 이게 나고 더이상 나는 나를 속이며 살기는 싫다. 당연히 그 녀석은 이미 땅속에서 얼굴만을 내밀고 있다가 겁을 잔뜩 먹은 주머니 쥐처럼 점점더 땅속으로 파고들어가듯이 허리를 숙였다.
˝저저정정말. 미미안해..˝
저녁의 노을 때문인지 붉게 변한 얼굴이 성모마리아의 후광처럼 그 녀석을 비춰주어 더욱 내가 나쁜 놈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듯 했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그 녀석을 괴롭히는 사람은 세계의 적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름은 이 혜민 나랑은 소꿉친구사이다. 성장을 하는 건지 마는 건지 내 가슴 까지 밖에 오지 않은 평균 미달의 키에(내가 키가 작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나무의 잔가지 몇개를 돌돌 뭉쳐서 묶어 놓은 듯한 가얄픈 팔에 조금은 황금빛을 띠는 긴 흑발에 변성기조차 피해가버린듯한 미성의 목소리는 모든이의 보호 본능을 자극시킬 테니까. 아 그 녀석은 여자다. 그것도 일일히 수작업으로 바느질하고 부드러운 털을 한땀한땀 가죽에 고정시킨듯한 귀여운 여자아이다. 바람불면 날아가고 손을 잡으면 부서질것 같고 그 등등의 모든 수식어가 적용되는 가히 최고의 페이스 마커다. 섹시하다는 것은 제외한다. 어찌되었든 나는 지금 화가 매우 나있다. 당연하지 않는가. 그리고 지금은 겨울이다. 그것도 찬 바람이 쌩쌩 몰아치는 한 겨울이다. 3시간은 그저 그런 시간이 아니다. 공부하고 밥을 해먹고 잠을 잘 수도 있는 그러한 귀중한 시간이다. 그러고보니 나도 인내성 하나는 참 훌륭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약속 시간전에 나왔는데, 집에 사정이..˝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해야지, 아니 전화라도 해줘야되는거 아니야?˝
˝아. 그게.. 깜박잊고 핸드폰 충전을..˝
˝그럼 집에 가서 하면 됬잖아 보아하니 집에서 지금 막 나온거 같은데.˝
˝아! 맞다.. 하하하.. 미미안..˝
구름한점 없는 하늘에 거울을 태양뒤로 하고 그 정면을 마주 하는 느낌이다. 그만. 녹아버릴거 같다고 그러니 그렇게는 그만 처다봐라.
˝휴, 그래도 지금까지 기다릴 줄은 몰랐어. 솔직히 간줄 알았지.˝
˝그래, 결국 날 불러낸 용건이 뭐야?˝
잠시 뜸을 들인후 우리는 내가 앉아 있던 벤치 보다 조금더 나은 수준의 다른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 이번에 내가 친구를 소개 시켜준다고 했잖아. 그것 때문에..˝
˝뭐! 고작 그거 때문에 내 3시간을? 학교에서 해도 되잖아 학교에서!˝
˝학교에서랑 밖에서랑 만나는 건 엄연히 다르다고.˝
할 말이 없다. 자고로 소개시켜준다는 친구는 지난달 전학온 사람이다. 해외에서 살다가 온 스위스인과 한국인 사이의 혼혈로 부모님이 일로 스위스를 떠난후 친가쪽이 있는 한국으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참고로 아직 난 이름도 모른다. 학교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나는 어쩔수 없이 외국인들을 수없이 만난 사람중 하나로써 고작 혼혈인을 가지고 난리벅석을 떤다면 오히려 내가 더 민망할 지경이다. 일단 그렇다 치고
˝그래서 그 친구는 어디에 있는데?˝
˝아 근처 카페에서,..˝
˝.... 나는 공원에서 이 겨울에 기다리게 하고.
˝아 정말 미안하다니까. 알잖아 내가 조금 덜렁거린다는거.˝
갑자기 내 말을 끈고 너라면 이해해 주겠지 라는 강한 포스를 담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 알지 알고 말고 하지만 조금이라는 단어의 선택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우리는 벤치에서 일어나서 공원을 가로 질러 찻길로 걸어갔다. 신호등을 건너고 도화지로 가는 도중 노을은 이미 저만치 사라지고 있었고 보랏빛의 하늘의 장막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있지도 않은 매미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지만 무시하고 옆에서 계속 중얼대는 이 조그마한 녀석의 이야기에 ´응´ ´그래´ 등만으로 애기를 주고 받으며 발걸음을 옴겼다. 도착한 곳은 나무로된 작은 서양식 카페였다. 고풍스러운 나무로된 간판에 필기체로 ´silent´ 라고 적혔있다. 침묵? 카페안에서 조용히 하라는 뜻인가? 카페에서 애기를 하지 않으면 안될텐데. 여기 장사 잘 될려나? 딸랑 거리는 문을 열때 나는 소리가 나를 생각에서 다시 현실로 돌려 보냈다.
˝아! 봉주르~˝
˝응~ 나도 봉주르~˝
봉주르? 내 귀가 이상하지 않다면 이건 분명히 프랑스어 이다. 아마 틀리지는 않겠지. 이래봐도 영어 실력은 수준급이다. 카페 가장 안쪽 가장자리 테이블에 앉아서 우리를 보면 손을 흔들고 있는 저 갈색머리의 소녀가 오늘의 주인공인가? 근데 왠 프랑스어? 스위스에서 산게 아닌가?
˝미안 기다렸지~˝
˝아냐 괞찮아. 나도 기다리면서 마스터랑 애기하고해서 즐거웠는걸. 여기 마스터 정말 좋으신 분 같아˝
˝히히. 아 이쪽이 내가 전에 말한 내 친구˝
바보 같은 웃음 소리를 내며 앞에서 나를 가리고 있다 옆으로 비켜서며 자랑 스럽다는 듯이 나를 보고 웃음을 지었다.
˝아.안녕? 아니 봉주르?˝
˝안녕으로 되˝
˝그럼 안녕. 난 ..˝
˝애는 성현이야. 나이는 우리랑 동갑이고 집은 우리 옆집에 살고 또.. 나랑 소꿉친구고 운동은 잘하는데 공부는 별로고 또,또,.. ˝
나는 내 개인 프로필을 일말의 주저없이 주절거리는 녀석의 뒤덜미를 독수리가 호수에서 물고기를 낙아채듯이 잡아서 은근한 미소를 보냈다.
˝어이. 그만하시지˝
˝아. 미안. 미안.˝
˝너도 고생이다. 이런 녀석이랑 만나게 되다니. 참고로 애는 정말 마이페이스야. 말릴수 있는 사람은 애네 오빠 정도? 부모님도 못말려.˝
˝그래? 그래도 맨 처음 나한테 다가온 사람인데, 그정도는 참을수 있어. 무엇이든지 처음이라는 것은 누군가에게나 특별하잖아?˝
유창한 한국어로 말하는 이녀석을 나는 신기한듯 처다보았다.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조금 안색이 찡그려지는 그녀를 보며 실수했다고 생각하고 얼른 말을 걸었다.
˝아 참 내 이름은.. 이미 알테고. 너는 이름이?˝
˝한국식이 좋아 아님 외국식이 좋아?˝
˝한국식이면 됬어.˝
무슨 이름이 두개씩이나 있는건지.
˝최 신희 야 새로울 신에 기쁠 희 매일 매일 새로운 기쁨만이 가득하길 이라는 뜻이래. 근데 나는 한자는 정말 어려워서, 그냥 그렇구나 해˝
˝아. 일단 만나서 반가워.˝
˝응 나도.˝
역시 혼혈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탁하지도 밝지도 않은 갈색의 머리에 보는 이로 하여금 빨려들어갈것 같은 푸른색의 눈동자가 참 인상적인 여자 아이였다. 말투도 조금은 어른스러운 것이 왠지모르게 의지가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카페에서 조금 이야기를 나누고 어느새 친해졌는지 카페 마스터와 뭐라고 애기를 한 신희는 양손에 커피를 들고 막 카페를 나가려는 우리에게 다가왔다.
˝선물이래.˝
간단히 한 마디를 하고 커피를 나누어 주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우리를 재촉했고 유난히 하얀 피부의 신희는 춥다는 듯이 웃깃을 여미었다. 혜민이는 춥다고 춥다고 노래를 부르며 입은 얼지 않게 하겠다는 듯 조금도 쉬지않고 이야기를 쏟아내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나름대로 대도시에 속하는 이 도시를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영화도보고 3명이서 노래방도 가서 시간을 죽였다. 혜민이는 뭐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얼굴에 맞지 않게 트로트를 불렀고 나는 그냥 마이크는 잡지 않고 호응만하며 귀를 막고 있었다. 신희도 노래는 하지않고 나처럼 가만히 앉아서 즐거운듯 얼굴에 웃음을 지어었다. 다시 거리를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한참을 스티커 사진기에서 보내며 싫다는 나를 억지로 끌어 인상이 찌그러진 내 얼굴이 한 가운데 자리잡은 사진을 결국은 얻고야 마는 집요한 짓을 하기도 했다. 참고로 나는 사진 찍는 걸 싫어한다. 보는 것은 좋지만.
어느덧 해가 지고 우리는 신희를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집으로 걸어갔다. 혜민이랑은 바로 옆집이니까 싫어도 어쩔수 없이 같이 가는 수밖에 없었다.
˝뭐야? 아직도 화냈어?˝
다소 의외라는듯 의아한듯 물어보는 혜민은 내가 대답을 해줄 때까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옆에서 알짱되기 시작했다.
˝아냐. 별로 화 안났어.하지만 다음부터 이러면 진짜 안참는다˝
˝알았어. 오늘은 정말 사고였어.˝
나도 이번 주말은 집에 틀어박혀 있으려고 했으니 그다지 상관없지만 쪼잔한 내 성격에 3시간이나 기다린 것을 좋게 웃으며 넘어가줄 내가 아니었다.
˝내일 학교에서 매점!˝
˝칫. 알았어. 사줄께.˝
나는 녀석이 집에 들어가면서 ˝치사한 쫌팽이!˝ 라고 소리를 간단히 무시하고 내 방에 들어가 옷을 벗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여자들의 파워는 막강하다. 보통 운동할때 들어가는 스테미나의 3배 이상이 놀고 쇼핑하는데 발히되는 이해할수 없는 존재들이다. 쓸데 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나는 눈을 감았고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아 내일은 체육이 들었지. 체육복은 빨았으려나?
2010년 4월 5일 월요일
오드아이 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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